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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제주에서는 이모보다 '삼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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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같은 곳이나 시장 같은 장소에서 잘 모르는 여성 판매자 또는 종업원에게 "이모 여기 OOO 하나 주세요"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었다. 일면식도 없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그 동네에 처음 방문했을 때도 우리는 편하게 '이모'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고모도 있고 외숙모도 있는데 왜 이모라고 부를까? 가부장적이었던 나라에서 아버지 형제지간이 더 가까울 텐데 성도 다른 이모를 왜 그렇게 불러댔을까? 

 

제주에 내려와 살면서 이곳저곳 다니며 이모라는 말을 들을 기회가 별로 없고 대신 "삼춘"이란 말을 자주 듣고 나도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친족 계보, 촌수 무시하고 성별 구분 없이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이 삼춘이다. 

 

지나가는 어른을 봐도 '삼춘', 서귀포 5일장에 가서 상인들 만나도 '삼춘', 식당 아주머니에게도 '삼춘' 그 어디에서도 "이모 OOO 하나 주세요"는 못 들어본 것 같다. 

 

드라마 취미가 없어서 잘 보지 않는데 제주를 배경으로 한 재밌는 드라마를 한다며 "우리들의 블루스"라는 드라마를 보라는 권유에 보기 시작했는데 와우~ 출연진부터 어밴져스 급이다. 차승원, 이병헌, 이정은, 고두심, 김혜자, 한지민, 김우빈 등등등... 나름 타작품에서는 주연급 배우들이 옴니버스 형태 드라마 노희경 작가의 이야기 속에 한 꼭지씩 담당하고 있다. 

 

<우리들의 블루스 - 방송 장면중>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김혜자는 옥동 삼춘, 고두심은 물질하는 춘희 삼춘이다. 트럭 한대가 전재산인 만물상 이병헌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삼춘들에게 물건을 판다. 오일장에서 생선 장사하는 이정은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삼춘 이거 물 좋수다게'하며 호객행위를 한다. 온통 다 삼춘이다. 제주판 로미오 쥴리엣 고딩역할 영주와 정현도 삼춘들한테 인사 안 한다고 꾸중을 듣는다. 

 

드라마 전반을 연결하는 이야기가 온통 삼춘들과 삼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연결이다. 

 

그러면 왜 제주도는 다 삼춘이라고 부르는 걸까? 

 

삼촌이 맞는 말이겠지만 남자 어른 여자 어른 할 것 없이 '삼춘'으로 통용된다. 아마도 이 말 또한 제주방언이라고 생각된다. 삼촌은 아버지 형제로 백부, 중부, 숙부이고 아버지와 사촌이면 당숙이 되는데 삼촌이란 말은 나와 정말 가까운 친족을 말하는 관계다. 

 

온 동네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 삼촌이니 제주도는 다 친족관계란 말이 되는 건가? 

 

아마도 친족관계라기보다 척박한 삶을 살던 제주 사람들만의 인정이 가득한 문화에서 비롯된 말이 아닌가 싶다. 바다에 나가 생계를 꾸리고 돌밭을 일구어 밭농사를 해야 했고 4.3 사건을 통해 많은 어른이 희생된 돌섬 제주에 서로를 챙기고 보듬던, 서울로 육지로 가버린 형제 친척보다 옆에서 같이 살아가는 이웃들 간의 끈끈함이 삼춘이란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만들게 된 것이 아닐까? 

 

지금은 나도 여자 어른 남자 어른 할 것 없이 삼춘이란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삼촌보다는 삼춘이 더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들린다. 삼촌은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진짜 친족에게 사용하는 말 같고 삼춘은 그냥 동네에서 어르신 아무나 봐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이다. 

 

이주민과 도민의 갈등에 괸당(궨당)문화가 있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제주도는 파란 당도 아니고 빨갛다도 아니고 괸당이라고 한다. 괸당은 친인척을 뜻하는 권당(眷黨)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흔히들 이웃사촌이라 말하듯이 넓은 의미로 이웃까지 포함한다.

 

제주에서 괸당을 모르고 사업을 할 수 없다고 조언하는 사람도 있고 괸당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고 불평불만하는 사람도 있다. 아마도 선거를 앞두고 있으니 각종 괸당(?)들의 점조직 같은 네트워크가 강하게 작동될 것 같다.

 

이제 나이로는 동네 아이들에게 '삼춘'이라고 불려야 할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 물론 동네 아이들이 날 보고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만 어렸을 때 추억의 삼춘들은 씀씀이 컸고 명절마다 용돈 찔러주던 분들이었는데 나도 제주에 살며 그런 어른이 돼야 삼춘이란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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